140822 슬기도 어리석음도 헛되다
2014.08.22 06:33
||0||0140822 새벽 묵상
. 읽은 말씀: 전도서 2:12~17
. 내 용: 슬기도 어리석음도 다 헛되다
1. 슬기로움과 어리석음에 대한 분별과 슬기로운 삶을 위한 노력도 다 헛되다.
2. 슬기로운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이나 결국 다 죽게 마련이다.
. 묵상 말씀: “슬기로운 사람도 죽고 어리석은 사람도 죽는다”(전2:16).
1. 결국 한 길에서 만난다
세상만사가 헛되다는 고백을 시작으로 펼쳐지는 전도서 허무 시리즈는 지혜와 즐거움에 이어 오늘, 슬기로움과 어리석음 모두를 두고 헛되다며 허무 시리즈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전도자는 슬기로운 삶을 위해 애를 써 보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슬기로움이 어리석음 보다 나은 빛 된 삶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했습니다.(13) 그런데, 그렇게 슬기로운 삶을 사는 것도 지혜를 얻으려는 것도 다 헛되다고 하니 이게 어찌된 일일까요? 슬기나 지혜로움도 다 필요 없다는 뜻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전도자가 그런 사실을 깨닫는 것도 그런 지혜와 슬기로움을 지녔기에 가능했을 터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그런 깨달음조차 얻지 못했을 터입니다. 빛된 삶인 슬기로움과 어두움의 삶인 어리석음을 싸잡아 헛되다고 한 것은 결국 죽음 때문입니다. 빛과 어두움이라는 두 길, 더 나은 삶고 안 좋은 삶도 결국 죽음이라는 길에서 만나더라는 것이죠. ‘슬기로운 사람도, 어리석은 사람도 다 죽더라’는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한계 앞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는 인간의 연약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 영생의 소망
그러면, 그렇게 인간은 죽음 앞에서 무력하게 지내야 할까요? ‘슬기로움도 어리석음도 모두 다 헛되다’는 고백으로 포기해야 하나요? 그렇지는 않을 테지요. 성서에서 가르치는 지혜는 이 세상에서 올바름과 선함을 지탱해주는 강력한 요인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소망입니다. 그 소망으로 인해 죽음도 극복하게 합니다. 죽음을 극복하는 그 요인은 이 세상에서 반듯한 삶을 지지해주는 역할을 하게 마련입니다. 그것은 바로 ‘영생에 대한 소망’이지요. 성서에서 가르치는 이 영생에 대한 소망은 이 세상에서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기도 합니다. 고난과 죽음의 위협이 상존하는 사역자의 길을 걸어가는 제자에게 사도 바울은 그 영생의 소망을 품고 있음을 고백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영원 전부터 약속해 두신 영생에 대한 소망을 품고 있습니다”(딛1:2). 사도 바울이 ‘선한 싸움을 싸우며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킬 수 있었던’(딤후4:7) 비결이기도 합니다. 영생에 대한 소망을 지닌 사람은 슬기로움도 어리석음도 다 의미가 있습니다. 의미가 있기에 인생의 허무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 읽은 말씀: 전도서 2:12~17
. 내 용: 슬기도 어리석음도 다 헛되다
1. 슬기로움과 어리석음에 대한 분별과 슬기로운 삶을 위한 노력도 다 헛되다.
2. 슬기로운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이나 결국 다 죽게 마련이다.
. 묵상 말씀: “슬기로운 사람도 죽고 어리석은 사람도 죽는다”(전2:16).
1. 결국 한 길에서 만난다
세상만사가 헛되다는 고백을 시작으로 펼쳐지는 전도서 허무 시리즈는 지혜와 즐거움에 이어 오늘, 슬기로움과 어리석음 모두를 두고 헛되다며 허무 시리즈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전도자는 슬기로운 삶을 위해 애를 써 보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슬기로움이 어리석음 보다 나은 빛 된 삶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했습니다.(13) 그런데, 그렇게 슬기로운 삶을 사는 것도 지혜를 얻으려는 것도 다 헛되다고 하니 이게 어찌된 일일까요? 슬기나 지혜로움도 다 필요 없다는 뜻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전도자가 그런 사실을 깨닫는 것도 그런 지혜와 슬기로움을 지녔기에 가능했을 터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그런 깨달음조차 얻지 못했을 터입니다. 빛된 삶인 슬기로움과 어두움의 삶인 어리석음을 싸잡아 헛되다고 한 것은 결국 죽음 때문입니다. 빛과 어두움이라는 두 길, 더 나은 삶고 안 좋은 삶도 결국 죽음이라는 길에서 만나더라는 것이죠. ‘슬기로운 사람도, 어리석은 사람도 다 죽더라’는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한계 앞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는 인간의 연약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 영생의 소망
그러면, 그렇게 인간은 죽음 앞에서 무력하게 지내야 할까요? ‘슬기로움도 어리석음도 모두 다 헛되다’는 고백으로 포기해야 하나요? 그렇지는 않을 테지요. 성서에서 가르치는 지혜는 이 세상에서 올바름과 선함을 지탱해주는 강력한 요인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소망입니다. 그 소망으로 인해 죽음도 극복하게 합니다. 죽음을 극복하는 그 요인은 이 세상에서 반듯한 삶을 지지해주는 역할을 하게 마련입니다. 그것은 바로 ‘영생에 대한 소망’이지요. 성서에서 가르치는 이 영생에 대한 소망은 이 세상에서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기도 합니다. 고난과 죽음의 위협이 상존하는 사역자의 길을 걸어가는 제자에게 사도 바울은 그 영생의 소망을 품고 있음을 고백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영원 전부터 약속해 두신 영생에 대한 소망을 품고 있습니다”(딛1:2). 사도 바울이 ‘선한 싸움을 싸우며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킬 수 있었던’(딤후4:7) 비결이기도 합니다. 영생에 대한 소망을 지닌 사람은 슬기로움도 어리석음도 다 의미가 있습니다. 의미가 있기에 인생의 허무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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