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329 계속되는 욥의 답변
2013.03.29 06:52
||0||0130329 새벽 묵상
. 읽은 말씀: 욥기10:1-22
. 내 용: 계속되는 욥의 고백
1. 빌닷의 조언에 대한 욥의 답변이 계속되고 있음.
2. 부당한 고난에 대한 항변과(1-7), 하느님께 탄원드리는 욥(8-17), 그리고 끝내 죽음을 또 다시 동경하는 욥(18-22).
. 묵상 말씀: “산다는 것이 이렇게 괴로우니 나는 이제... 내 영혼의 괴로움을 다 말하겠다”(욥10:1).
1. 혼돈스러운 욥
욥의 친구 엘리바스와 빌닷의 조언에 대한 욥의 답변을 통해 나타난 욥의 모습이 너무 혼란스럽습니다. 그 고통의 깊이야 어찌 말로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만, 그 고통 앞에서 쏟아내는 욥의 고백은 그 어떤 혼돈스러움을 느낍니다. 눈길은 하느님을 향해 있지만 그의 입에서 나오는 고백들은 하느님에 대한 원망스러움을 가득차 있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경배가 일상화되어있었던 욥입니다. 그랬던 그가 고난 앞에서 그의 경배가 탄식과 원망으로 변한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탄식과 원망은 부질없음을 고백하며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을 구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하느님의 속성과 성품을 형편없이 왜곡시키기도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늘 나를 해칠 생각을 몰래 품고 계셨습니다”(13). “주님께서는 내가 올바른 일을 한다고 해서 나를 믿어주지 않았습니다”(15)고 했습니다. 이건 너무 심한 왜곡입니다. 그러면서 죽음을 동경하기도 합니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갈지자 행보를 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2. 이성의 한계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특별한 능력과 권리가 있다면 바로 이성입니다. “왜”라는 질문과 함께 삶에 대한 회의를 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성의 작용 때문입니다. 그 이성의 작용을 통해 하느님은 인간에게 자유를 주셨고, 그 자유로운 선택을 통해 하느님은 영광을 받기 원하셨으며 인간에게 진정한 행복과 삶의 의미를 느끼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이성의 한계’라는 게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 한계를 깨닫는 것, 어쩌면 그게 이성의 궁극적인 역할일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가 안다는 것은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無知之知)을 의미할 뿐입니다. 그래서 지적으로 성숙한 이는 안다는 말보다 모른다는 말이 더 익숙할 터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욥은 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하느님을 다 아는 것처럼 만용을 부렸습니다. 그 본문은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니”(13)로 시작되어 17절까지 이르는 말씀이 바로 그 내용입니다. 그 만용의 결과는 죽음 동경이었습니다. 자신을 파멸시키고 사탄으로 하여금 회심의 미소를 짓게하는 그런 충동 말입니다.
. 읽은 말씀: 욥기10:1-22
. 내 용: 계속되는 욥의 고백
1. 빌닷의 조언에 대한 욥의 답변이 계속되고 있음.
2. 부당한 고난에 대한 항변과(1-7), 하느님께 탄원드리는 욥(8-17), 그리고 끝내 죽음을 또 다시 동경하는 욥(18-22).
. 묵상 말씀: “산다는 것이 이렇게 괴로우니 나는 이제... 내 영혼의 괴로움을 다 말하겠다”(욥10:1).
1. 혼돈스러운 욥
욥의 친구 엘리바스와 빌닷의 조언에 대한 욥의 답변을 통해 나타난 욥의 모습이 너무 혼란스럽습니다. 그 고통의 깊이야 어찌 말로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만, 그 고통 앞에서 쏟아내는 욥의 고백은 그 어떤 혼돈스러움을 느낍니다. 눈길은 하느님을 향해 있지만 그의 입에서 나오는 고백들은 하느님에 대한 원망스러움을 가득차 있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경배가 일상화되어있었던 욥입니다. 그랬던 그가 고난 앞에서 그의 경배가 탄식과 원망으로 변한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탄식과 원망은 부질없음을 고백하며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을 구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하느님의 속성과 성품을 형편없이 왜곡시키기도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늘 나를 해칠 생각을 몰래 품고 계셨습니다”(13). “주님께서는 내가 올바른 일을 한다고 해서 나를 믿어주지 않았습니다”(15)고 했습니다. 이건 너무 심한 왜곡입니다. 그러면서 죽음을 동경하기도 합니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갈지자 행보를 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2. 이성의 한계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특별한 능력과 권리가 있다면 바로 이성입니다. “왜”라는 질문과 함께 삶에 대한 회의를 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성의 작용 때문입니다. 그 이성의 작용을 통해 하느님은 인간에게 자유를 주셨고, 그 자유로운 선택을 통해 하느님은 영광을 받기 원하셨으며 인간에게 진정한 행복과 삶의 의미를 느끼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이성의 한계’라는 게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 한계를 깨닫는 것, 어쩌면 그게 이성의 궁극적인 역할일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가 안다는 것은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無知之知)을 의미할 뿐입니다. 그래서 지적으로 성숙한 이는 안다는 말보다 모른다는 말이 더 익숙할 터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욥은 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하느님을 다 아는 것처럼 만용을 부렸습니다. 그 본문은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니”(13)로 시작되어 17절까지 이르는 말씀이 바로 그 내용입니다. 그 만용의 결과는 죽음 동경이었습니다. 자신을 파멸시키고 사탄으로 하여금 회심의 미소를 짓게하는 그런 충동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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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앞에서 원망과 탄식을 하다가도 자비를 구하는 모습,
그러다 포기하고 마지막 죽음을 동경하는 모습....
그러면서도 하느님의 끈을 절대 놓지 않고,
끝까지 붙들어야 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