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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원감리교회

150515 악인의 형통에 대한 의문

2015.05.15 07:25

이주현목사 조회 수:100

150515 새벽 묵상

. 읽은 말씀: 예레미야12:1-17

. 내 용: 예언자의 질문과 하느님의 답변

1. 아나돗 사람들의 악행을 알고 나서 배신자와 악인의 형통에 대한 의문을 하느님께 질문.

2. 예언자의 질문에 대한 하느님의 답변.

 

. 묵상 말씀: “네가 사람과 달리기를 해도 피곤하면, 어떻게 말과 달리기를 하겠느냐?”(12:5)

1. 악인의 형통

예언자의 길은 고독합니다. 개인의 자유가 극히 제한되어있는 사명자의 길을 걸어야하기 때문이지요. 때론 한눈도 팔고 싶지만, 그것은 마음뿐이지 틈과 여력이 없습니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세상을 혼자 헤매고 다니면서, 하느님의 공의가 눈앞에서 펼쳐지는 것 하나로 위안을 삼을 뿐이죠. 그런데 그러한 하느님의 공의가 지연될 경우, 예언자의 사명은 흔들릴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예레미야의 모습이 바로 그 모습입니다. 아나돗 사람들의 살해 음모를 알고 난 뒤, 견디기 힘든 충격을 받은 듯합니다. 그러면서 예레미야는 악인의 형통에 대하여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악인은 형통하며, 배신자들이 모두 잘 되기만 합니까?”(12)라고 말입니다. 악인의 형통 이면에는 의인의 고난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사실, 의인의 고난이 없다면 악인의 형통이 문제될 리 없을 터입니다. 악인의 형통은 사실, 그렇게 보일 뿐 일종의 저주요 재앙일 뿐입니다. 잘못된 길을 가도 아무런 경고나 악을 제한하는 걸림돌이 없다면 결국 그게 심판 그 자체일 터입니다.

2. 의인의 고난

이제 하느님은 예레미야의 질문에 대하여 질책성 답변을 주고 있습니다. ‘사람과 달리기를 하면서 피곤하면 어찌 말과 달리기를 할 수 있겠느냐’(5)고 말입니다. 사람과 말과 달리기를 한다는 것은 아나돗 사람들로부터 당하는 고난과 바빌론으로 당하는 고난을 비교한 내용으로 아나돗 사람들로부터 당한 배신감에 낙담한 예레미야에 대한 질책인 셈입니다. 그렇습니다. 악인의 형통은 저주요 재앙입니다. 그 끝이 파멸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의인의 고난은 그 동기가 다르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자녀가 어디 있겠습니까”(12:7)라고 했습니다. ‘징계를 받지 않는 자녀가 있다면 사생이이지, 참 자녀가 아니’(12:8)라는 것이죠. 의인이 받는 고난은 그런 면에서 받는다는 표현보다 느낀다는 표현이 맞습니다. 그렇게 느낄 뿐, 내용적으로 고난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고난을 당하면서 우리의 신앙과 인격이 다듬어져 보석 같은 신앙과 인격으로 만드시려는 하느님의 손길을 느낀다면 의인의 고난은 고난이 아니라 축복일 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