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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원감리교회

130508 엘리후의 마지막 발언

2013.05.08 06:19

이주현 조회 수:572

||0||0130508 새벽 묵상
. 읽은 말씀: 욥기37:1-24
. 내     용: 엘리후의 마지막 발언
1. 자연현상을 통해 나타나는 하느님의 주권적 섭리와 위대한 권능에 대하여 언급.(1-13)
2. 즉량할 수 없는 지혜와 능력을 지니신 하느님에 대한 경외를 권면함.(14-24)

. 묵상 말씀: “사람이 하느님을 경외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욥37:24).
1. 스승이 된 엘리후
오늘 본문을 마지막으로, 그동안 이어져 온 욥의 세친구와 엘리후의 발언이 끝이 납니다. 엘리후는 마지막 발언을 의식한 듯 작심하고 말을 시작합니다. 욥과 세 친구를 지칭하는 “네 분”에 대하여 “하느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라며 말로 발언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연 현상 속에 나타난 하느님의 신비하고 오묘한 일들과 그 위엄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자연 속에서 일어나는 온갖 현상들 속에서 하느님의 주권과 섭리를 언급하는 모습이 많이 훈련된 사상가답습니다. 이제 엘리후는 그러한 하느님 앞에서 우리가 취할 자세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분을 경외하는 것 밖에는 없다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스스로 지혜롭다고 하는 사람을 무시하시는 하느님을 언급하며 스스로 낮아질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높고 푸른 하늘과 숲이 있는 자연 속에서 어린아이들을 놓고 하느님을 가르치는 교사의 모습이 연상되는 순간입니다. 문제는 그렇게 열정적으로 좋은 말을 전하면서도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왜 그럴까요?    
2. 자가당착 (自家撞着)
자가당착이라는 한자성어가 있습니다. “같은 사람이 하는 말과 행동의 앞뒤가 어긋나 모순된다”는 뜻입니다. 엘리후의 모습에서 그게 보이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오묘하신 섭리와 위엄을 말하고 그 분의 주권 앞에서 겸손히 경외할 것을 가르치면서 그는 해서는 안 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있는 사람들인 욥과 세 친구를 앞에 두고 “하느님의 음성을 들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이 놀라운 솜씨를 알기라도 하십니까”(16)라고 하며 ‘당신들이 알고 있는 것은 고작 ~뿐일 것’이라며 그들을 폄하하고 있습니다. ‘자기는 다 알고 있는 것을  당신들은 모른다’는 억지와 오만이 느껴집니다. ‘당신들이 모르고 있는 것을 가르쳐 줄 테니 잘 들어야 한다’는 식의 어투가 느껴집니다. 아무리 좋은 말을 해도 그런 태도를 지닌 사람의 말은 귀에 들어오질 않는 법입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말이나 문자가 주는 영향력보다는 그 말과 문자를 대하는 사람의 자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옥토에 뿌려진 씨앗’이야기를 해주신 것 아닌가요?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결단코 사람들을 함부로 평가하거나 폄하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