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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원감리교회

130506 엘리후의 세 번째 발언

2013.05.06 06:22

이주현 조회 수:558

||0||0130506 새벽 묵상
. 읽은 말씀: 욥기35:1-16
. 내     용: 엘리후의 세 번째 발언
1. 하느님의 절대적 주권과 초월성 그리고 인간의 무력함을 언급.(1-8)
2. 하느님이 응답하지 않는 이유를 언급한 엘리후의 발언.(9-16)

. 묵상 말씀: “그 악한 자들의 울부짖음에는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욥35:13).
1. 반복되는 엘리후의 발언
고난 받는 욥에 대하여 죄인으로 악인으로 전제하고 들이대는 엘리후의 발언이 길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고난 받기 때문에 악인이 되어버린 욥으로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이지만, 처지가 옹색해진 욥으로서는 딱히 다른 방도가 없어 보입니다. 이에 엘리후의 기세는 더욱 더 거세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욥이 한 발언과 태도에 대하여 조목조목 반박하며 욥을 궁지에 몰아넣고 있습니다. 먼저 하느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인간의 무력함(1-8)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공의에 대하여 욥의 불신앙적인 태도 때문입니다. 또한 하느님이 응답하시지 않는 이유를 언급(9-16)하고 있는데, 이는 욥이 하느님 앞에서 무례하고 허탄한 요구를 하기 때문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판단은 모두 엘리후가 한 것들입니다. 혼자서 판단하고, 혼자서 정죄하고, 혼자서 발언을 이어가고 있는 셈입니다. 그래서인지 분명히 하느님을 언급하고 그 분의 뜻을 말하고 있지만 선뜻 신뢰가 가질 않습니다.
2. 위로가 되는 말
하나마나한 이야기를 길게 이어가는 엘리후도 딱하지만, 그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욥의 신세도 딱하긴 마찬가지입니다. 젊은 후배한테 “어른은 자기가 하는 말이 무엇인지도 모르시는 것이 분명합니다”(16)라는 말까지 듣고 있으니 말입니다. 젊음에서 나오는 패기로만 치부하기엔 뭔가 궁색해 보입니다. 고난을 당하는 욥에게는 사실 장황한 연설이나 논리 보다는 그의 고난에 대한 공감일 터입니다. 그의 고난을 조금이라도 나누려는 따뜻한 애정과 신뢰가 부족해 보입니다. 말 보다는 따뜻한 눈길이 더 필요한 욥인데 말입니다. 차라리 말을 하지 않는 게 더 나을 터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 인간적인 신뢰와 애정을 지니고 사는 사람들은 말이 없거나 적습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때론 진한 눈길 한 번으로 백 마디 말을 주고받을 수도 있습니다. 패망을 향해 치닫는 조국을 바라보며 예레미야는 말보다는 눈물을 더 많이 흘렸습니다. 자고로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은 신뢰가 가질 않습니다. 문제는 신뢰와 애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