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매원감리교회

농어촌 교회 방문

목사 2014.11.18 18:59 조회 수 : 1750

20141009_101940.jpg


SAM_3987.jpg

교회 안에서 담임목사이신 이상진 목사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

SAM_3988.jpg


SAM_3990.jpg


SAM_3991.jpg


SAM_3993.jpg


SAM_3995.jpg


SAM_3996.jpg

말씀을 듣고 유구면에 있는 유구정육점식당에서 한우 고기로 식사를 하였습니다. 이날 식사는 함께 참여하신 변상선 집사 내외분께서 접대하셨습니다.

SAM_3997.jpg


SAM_3998.jpg


SAM_3999.jpg


SAM_4000.jpg


2014년 11월 18일(화)  충청연회 예산지방 광시송림교회를 방문하였습니다.

선교부(부장: 최재흥 장로, 권미자 장로) 주관으로 준비된 이 방문 행사는 올 봄 금마 교회에 이어 두 번째로 이어진 방문 행사입니다.

미자립 교회의 어려운 여건이지만 최선을 다해 큰 성과를 내고 있는 광시송림교회와 담임목사이신 이상진 목사님의 이야기를 듣고 큰 감동을 받고 왔습니다.

우리들의 방문이 어려운 여건 속에서 최선을 다하는 목사님과 교우들에게 힘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함게 기도하는 시간도 가졌습니다.

참여자: 이주현 목사 권미자 장로 나상훈 장로 전태옥 권사 백서현 권사 유경순 권사 이수복 권사 곽상예 권사 김명숙 권사 김수경 권사 이석순 성도 변상선 집사  이상 12명이 다녀왔습니다.


아래는 담임목사이신 이주현 목사께서 농촌과 선교에 기고한 내용입니다.


고난의 씨앗으로 맺은 희망의 열매

-생명일꾼 예산 광시송림교회 이상진 목사 이야기-

 

이주현 목사(본지 편집위원, 매원교회)

 

 

사과의 고장으로 유명한 충남 예산에 한우로 유명세를 떨치는 마을이 있다. 인구 3,700여 명이 살고 있는 광시(光時)면이 그 곳이다. 그래서 충남의 내륙 지방에 속하는 광시면은 주말이면 질 좋고 맛 좋은 한우고기를 구하려는 인파로 붐비는 곳이기도 하다.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무한 천을 앞에 둔 광시면 소재지에서 무한 천을 건너 동쪽 방향으로 2km남짓 들어가면 시목(矢目)리라는 동네가 나온다. 동리의 모습이 살목같이 생겼다고 해서 살목리라고 부르다 시목리가 된 곳이다. 청양군과 경계를 이루는 법산(459m)을 등지고 남쪽 방향으로 자리를 잡은 아담한 동네이다.

따사로운 가을 햇볕에 익어가는 누런 들판이 평화롭게 보이는 그곳에 날마다 웃음꽃이 피어나는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목사가 살고 있다. 광시 송림교회 담임 목사인 이상진 목사(46)이다. 아내 함정란(48)과 중학생인 큰 아들 하늘이(14)와 둘째 민성이(11), 막내 딸 채은이(3) 이렇게 다섯 식구는 늘 행복한 웃음꽃이 떠나질 않는다. 그가 운영하는 네이버 카페 꿈포유를 보면 그 내용을 자세하게 볼 수 있다. 주로 양파를 공동 생산하여 가공하여 판매하는 꿈이 익는 영농조합법인의 공동 대표로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지만, 가족의 행복을 위해 빈틈을 보이지 않으려는 헌신적인 모습이 참 아름답게 보였다. 작은 체구지만 노동으로 다져진 다부진 체구가 느껴진다. 안경 넘어 보이는 맑은 눈동자와 검게 그을린 피부가 이 목사의 건강 상태를 보여주는 듯 했다.

이렇게 희망과 기운이 넘치는 건강한 이 목사의 행복 이야기는 어느 날 갑자기 저절로 생겨난 것이 아니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가 그렇게 울어댔듯 말로 다 표현 못하고 글로 다 남길 수 없는 고난의 여정이 있었다. 그가 이룩한 행복은 결국, 고난의 여정 끝에 맺은 열매인 셈이다. 증조부 때부터 5대째 기독교 신앙을 이어오고 있는 이 목사의 인생 여정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순탄치 않은 여정 속에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은총의 손길이 느껴진다. 그 손길은 목회자의 길로 들어서면서부터이다.

 

처음부터 정주(定住)목회를 꿈꾸다

5대째 기독교 신앙을 이어온 이 목사의 가계도가 심상치 않다. 목회자가 나올 법도 한데, 친인척 말고 직계로는 이 목사가 처음이다. 선교초기에 복음을 받아드린 증조부는 장로의 직분을 받으실 정도로 헌신적이셨다. 그러나 권사의 직분을 받고 공주시 계룡면 작은 동리에서 농촌 교회를 섬기시던 부친께서는 목회자의 잦은 이동으로 교회가 만신창이가 되는 모습을 보고 많은 상처를 입으셨다. 그 때문인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은혜 체험을 한 이 목사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신학교를 가겠다고 하자 몽둥이를 들었다고 한다.

그렇게 시작한 신학 수업은 13년 만에 졸업을 하게 되었다. 신학을 하면서 접한 리빙스턴 전기를 통해 섬김과 헌신에 대한 개념을 새롭게 새기게 되었고 성서를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누구나 꿈꾸는 도시의 번듯한 대형교회 대신 농촌에서 정주목회를 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신학을 하겠다는 아들에게 들었던 아버님의 몽둥이가 주는 의미를 신학 수업 13년 동안에 정주목회라는 것으로 결실을 맺은 셈이다. 교회를 섬기는 목회자가 이사할 준비를 하며 사는 것은 일상일 터인데, 물리적 기반이 취약한 농어촌 교회에서 정주 목회는 이 시대 또 다른 의미로 받아드릴 수밖에 없는 처지가 아닌가? 증조부 때부터 다져온 신앙과 뿌려진 씨앗이 결코 헛되지는 않았을 터, 이 목사에게 있어 정주목회에 대한 결심은 그렇게 5대를 이어온 신앙의 결실인 셈이다.

그러한 결심과 다짐으로 교회에 부임했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10여 명 되는 교우들의 헌금으로는 목회자의 생활비는 물론 교회를 관리하고 운영하기도 버거웠다. 그런 상황에서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도시교회에서 보내주는 선교후원금이었다. 처음에는 고마웠지만 그 선교비를 끊는 것이 자립과 자생의 길이요, 그게 장기적인 정주목회의 첫 단계임을 인식한 셈이다. 어렵지만 그러한 결단을 해야 할 시기를 잡고 차근차근 준비를 해나갔다.

 

정주목회, 고난의 여정

그 첫 시도가 콩 농사였다. 콩을 수확하여 메주나 장을 담가 그것을 통해 수입을 창출한 목적이었던 셈이다. 4년 여 땅을 임대하여 교우들과 함께 지은 농사는 보기 좋게 망했다. 그동안 관행 농법으로 피폐해진 땅에다 농약과 화학 비료 없이 농사를 지으려니 잘 될 거라고 생각한 게 잘못이었다. 풀 한 포기 뽑는 것과 벌레 한 마리 제거하는 것까지 하나님의 창조 원리를 고민하며 농사를 지으려는 이 목사를 이해 할 수 있는 교우들이 과연 몇이나 되었을까? 때맞춰 들어온 중국산 콩으로 인해 폭락을 거듭한 콩 값은 덤으로 생긴 문제였다. 게다가 생산한 콩으로 애써 가공한 식품들도 판로가 문제였다. 유기농으로 만들기만 하면 팔릴 것이라는 생각은 너무나 안일한 생각이었던 것이다. 선한 의도와 의욕을 갖고 자신만만하게 시작한 콩 농사는 보기 좋게 망했다.

그렇게 닥친 어려움은 지병인 당뇨의 악화로 이어졌다. 당뇨는 합병증이 무서운 병이다. 합병증으로 인해 이 목사는 눈이 실명 직전까지 갔다. 피가 잘 돌지 않아 마비가 된 다리 치료를 위해 열기구를 둘렀다가 화상을 입기도 했다. 화상 치료를 위해 항생제를 복용했고, 그로 인해 장이 약해져 하루에 설사를 50회 이상 한 적도 있었다. 할 수 없이 성인용 기저귀를 차고 다니게 되었고, 한 끼에 100ml 정도의 적은 양의 식사로 연명하기에 이르렀다. 성경도 볼 수 없었고 설교도 심방도 할 수 없었다. 이 목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한 숨 섞인 기도뿐이었다. 목회를 정리하려는 맘을 먹고 유서를 쓰는 심정으로 글을 써내려가던 중, 그동안 목회자로서 살아온 자신의 모습을 성찰하면서, 자신의 삶은 순전히 양떼를 돌보는 목회자가 아닌 자신만을 돌보는 목아자(牧我者)로 살아왔다는 깨달음이 강하게 와 닿았다.

문득,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25:40)는 말씀이 떠올랐고 이내 입양기관에 달려가 한 남자 아이를 입양했다. 그 아이가 지금 초등학교 4학년이 된 둘째 민성이다. 어린 민성이가 한 가족이 된 이후부터 이 목사의 삶은 달라졌다. 아니, ‘달라져야만 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살아야 하고 그래서 그 아이에게 좋은 아빠가 되어야 하고, 가족의 소중함을 알려줘야 할 의무와 목표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지가 생기면서 소중한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수천 만 원의 견적이 나온 고름 투성이의 잇몸 치료비가 단 돈 50만원에 치료해 줄 치과 의사도 만났고, 실명 직전의 시력 회복의 단초를 마련해줄 안과 의사도 만났다. 당뇨 치료를 위한 혈당 조절 기술을 습득한 것도 이 때이다. 이 목사는 이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한다.

이 목사의 삶에 대한 의욕은 본격적인 당뇨치료를 위한 시도로 이어졌다. 우선 당뇨로 인해 손상된 혈관을 회복시키는 일을 시작했다. 미생물로 발효시킨 양파 즙이 가장 적절한 식품임을 알게 되었고 건강원에 가서 주문했으나, 이 목사가 원하는 방식으로는 가공할 수는 없었다. 이 목사는 건강원에서 사용하는 기계를 구입, 자신이 직접 고안해 낸 방식으로 구조 변경을 하여 양파 즙을 직접 생산하여 복용하기 시작했다. 또한 교회 앞마당에 열린 오디를 발효시켜 식초(오디를 발효시켜 만든 식초에는 21가지 필수 아미노산 가운데 18가지 아미노산을 함유하고 있다고 한다)로 만들어 지속적으로 복용한 결과, 기적과 같은 일들이 벌어졌다. 실명 직전까지 갔던 시력은 회복되었고(현재 좌우 시력 1.00.8) 혈당도 놀라울 정도로 떨어지거나 조절이 가능해졌다. 이러한 사례가 주변에 알려지면서 양파 즙을 주문하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지난 5월에는 이러한 사례를 취재한 SBS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유명세를 타기도 하였다.

 

고난의 씨앗, 기쁨의 열매로

양파 즙의 효능이 주변에 알려지면서 주문이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이 때 이 목사는 콩 농사로 폐만 끼치고 몸도 가누지 못하는 자신을 보살펴준 교우들과 주민들에게 이를 통해 뭔가를 해드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체계적인 생산과 가공, 유통과 이에 대한 정부의 지원을 받기 위해 영농조합법인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문제는 종자돈이 없었다. 조합원이라고는 하지만 노인들로 구성된 가난한 교우들로서는 엄두도 못 낼 일이었던 셈이다. 하는 수 없이 기도만 하고 있던 중, 오토바이 사고로 중상을 입게 되었다. 중앙선을 침범한 트럭과 충돌한 것이다. 병원에서 깨어나 보니 갈비뼈 12개와 쇄골이 부러지는 중상이었다. 이러한 진단을 받고 난 이 목사는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고 했다. 보험회사를 통해 지불될 보상금 때문이었다. 그 보상금으로 영농조합법인을 설립할 수 있다는 꿈과 희망으로 병상을 뛰어다니며 병상에 있는 환자들의 온갖 시중을 다들었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 목사의 눈가가 촉촉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급기야 장비들을 구입하고 창고를 짓고 제법 규모 있는 법인체를 꾸려갔다. 개인의 지병 치료를 위해 시작한 일이 교우들의 소득 사업으로까지 확대되자 마을 이장이 찾아왔다고 한다. 제법 확장된 사업에 대한 관심 차원을 넘어 기술 이전까지 요청했던 셈이다. 잠시 동안의 갈등 끝에 이 목사는 모든 것을 비우고 일체의 자료를 다 넘겨주었다고 했다. 얼마 후 놀라운 일이 생겼다. 주민 회의 결과 영농법인을 마을기업으로 인정하고 모든 편의를 제공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이었다. 이제 이 목사가 설립한 꿈이 익는 영농조합은 마을기업이 되었고, 그 일로 인해 이 목사는 충남 마을기업협의회부회장 일까지 맡아 보게 되었다. 그게 2012년의 일이다.

이제 시목리 농민들은 영농법인으로 인하여 실질적인 소득 증대를 가져오게 되었다. 그전에는 평당 2천 원 남짓 소득을 올렸지만 현재는 생산과 가공, 유통까지 책임을 지는 법인 덕분에 평당 5만 원의 소득을 올린다고 했다. 실제로 올 해, 양파의 과잉 공급으로 다른 곳에서는 밭을 갈아엎는 일이 발생했지만, 이곳에서는 처음에 계약한대로 20kg2만 원씩 수매를 했다. 이에 생산자들이 스스로 만 원씩 받는 일도 생겼다고 했다.

이 영농조합에서 취급하는 품목은 양파와 돼지감자, 오디로 마을기업의 요건에 따라 철저하게 현지 생산품만을 취급하며 생산부터 가공 공정까지 현지인들의 인력으로 꾸려진다. 물론 이익은 전액 마을주민들에게 환원되는 구조이다.

 

성서의 가르침에 입각한 자연농법

이 목사가 법인에서 공동으로 경작하는 밭을 가봤다. 돼지감자가 심겨진 밭에는 작년에 뿌린 톱밥이 흙과 뒤섞여 있었다. 흙에 영양분을 공급하기 위해 올 해도 상당량의 톱밥을 직접 만들어 밭에 뿌릴 계획이다. 또 한 곳에는 다 익은 수단그라스(수단수수)가 잘려진 채 밭에 널브러져 있었다. 500여 평 되는 밭에 심은 수수를 곡물로 수확하면 기백만 원은 넉넉히 나올 터이지만, 모두 다 밭에 거름용으로 묵힐 예정이다. 이러한 농법은 철저하게 성서에 기반하고 있다. 성서에서 안식년을 정하여 농토를 쉬게 한 것처럼, 이 목사도 그 정신을 살려 안식년 대신 이모작은 하지 않기로 했다. 밭을 혹사시키지 않는다는 정신이다. 그래서 수단그라스를 심긴 했지만 그것을 수확하지 않고 거름용으로 되돌려 준 셈이다.

그러한 가치와 정신을 성서에서 찾은 이 목사에게 유기농도 사실 만족스럽지 못하다. 이 목사에게 있어 땅을 곡물을 생산하는 수단을 넘어 하나의 인격체로 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의 생명을 다루듯 땅을 대한다. 그러한 가치와 정신은 지병으로 인한 고통의 시간을 보내면서 몸의 구조와 병의 본질을 터득한 덕분이다.

 

이 목사에게 소박하지만 소중한 꿈이 있다. 정주목회자로서 지속 가능한 상황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래서 이 목사는 귀농 귀촌하는 사람들을 위한 공동체를 꿈꾸고 있다. 6가구 정도의 규모로 함께 농사도 짓고 삶을 꾸려나가는 그런 공동체다. 현재 토지를 구입하기 위한 구상 단계에 들어가 있다. 농촌에 정주하는 주민의 시각으로 길을 찾다보니 의외로 그런 가능성은 많아 보인다.

형편이 되는대로 교회도 새로 지을 예정이다. 유기농식품으로 짜인 식단을 제공하는 마을 식당을 운영하고 생태계 파괴에 대한 심각한 상황을 교육하고 보전과 실천을 위한 공간도 마련할 계획이다. 또한 귀농, 귀촌하는 사람들이 임시로 머물 수 있는 공간과 사설 요양시설을 기피하는 마을 어르신들을 위한 어르신 쉼터를 운영할 예정이다. 이러한 일들이 다 이루어지면 교회는 예배 처소 뿐 아니라 마을의 복합 문화시설이 되는 셈이다.

대화를 마치고 직접 생산한 오디 식초를 선물로 받았다. 자연 발효 식초로 정말 소중한 선물을 받은 셈이다. 이왕 간 김에 양파 즙도 20여 상자 차에 실었다. 갑자기 피가 맑아진 듯, 몸에서 생기가 도는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