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811 지혜를 구하는 이
2014.08.11 06:59
||0||0140811 새벽 묵상
. 읽은 말씀: 잠언30:1-6
. 내 용: 지혜를 구하는 사람
1. 지혜를 구하는 사람의 세 가지 모습을 언급함.
2.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는 이, 세상을 창조하신 분의 이름을 아는 이, 그 분의 뜻(말씀)을 깨닫는 이.
. 묵상 말씀: “참으로 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우둔한 짐승이며, 나에게는 사람의 총명이 없다”(잠30:1).
1. 무지지지(無知之知)
無知之知, 이를 직역하면 “알지 못함이 곧 알음이다”는 뜻입니다만, 주역에서는 이를 “어둡고 어리석은 듯 은밀한 가운데 알려고 아니해도 깨닫는 알음”의 의미로 쓰이고 있습니다. 자신의 의지든 아니든, ‘자신의 알지 못함을 인식하는 것이 참 알음’이라는 의미는 같은 듯싶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굴이 전하는 지혜의 첫 가르침은 그렇게 시작합니다. ‘나는 사람이 아니라 우둔한 짐승이다’라는 고백으로 말입니다. 솔로몬 시대 최고의 지혜자로 손꼽히던 이가 아굴인데, 그가 어찌하여 짐승만도 못하단 말인가요? 자신의 모자람, 온전함에 이르기에는 여전히 부족한 자신에 대한 깨달음과 그에 대한 고백이진 셈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의 한계와 모자람을 깨닫는 자세가 지혜를 구하고 지혜를 최고로 아는 사람들의 자세입니다. 사람은 그런 부족함을 깨달을 때 비로소 구하게 마련입니다. 부족함을 많이 깨달을수록 그 간절함도 커지게 마련이지요. 결국 부족함을 깨닫는 것 만큼 그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셈입니다. 이는 성서 뿐 아니라 주역, 소크라테스도 가르쳤던 교훈입니다.
2. 존재의 근거와 방식
아굴은 본문을 통해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는 것에 이어 세상을 창조하신 이의 이름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바람을 손에 움켜쥐고 있고, 물을 그 옷자락으로 싸고 있고, 땅의 모든 경계선을 그은 사람’ 말입니다. 결국 우리가 딛고 있는 터전을 지으신 이를 일컫는 말씀이지요. 자신이 딛고 있는 터전을 지으신 이의 이름, 곧 존재의 근거에 대한 물음입니다. 존재의 근거에 대한 물음은 곧 그 분의 뜻으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아굴은 “하느님의 말씀은 모두 순결하며, 그분은 그를 의지하는 사람의 방패가 되신다”(5)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세상을 만드시고 운행하시는 그 분의 이름을 아는 것이 존재의 근거에 대한 깨달음이라면, 그 분의 뜻(말씀)을 구하고 깨닫는 일은 ‘존재의 방식’에 대한 영역일 터입니다. 절대자 앞에서 자신의 존재를 성찰하고, 절대자의 이름과 뜻을 통해 존재의 근거와 방식을 깨닫는 이, 그런 사람이 바로 지혜를 구하는 사람의 모습임을 아굴은 가르치고 있는 셈입니다. 아! 그러고 보니 모든 게 다 은총입니다. 그게 내 맘대로 되는 일이 아니니 하는 말입니다.
. 읽은 말씀: 잠언30:1-6
. 내 용: 지혜를 구하는 사람
1. 지혜를 구하는 사람의 세 가지 모습을 언급함.
2.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는 이, 세상을 창조하신 분의 이름을 아는 이, 그 분의 뜻(말씀)을 깨닫는 이.
. 묵상 말씀: “참으로 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우둔한 짐승이며, 나에게는 사람의 총명이 없다”(잠30:1).
1. 무지지지(無知之知)
無知之知, 이를 직역하면 “알지 못함이 곧 알음이다”는 뜻입니다만, 주역에서는 이를 “어둡고 어리석은 듯 은밀한 가운데 알려고 아니해도 깨닫는 알음”의 의미로 쓰이고 있습니다. 자신의 의지든 아니든, ‘자신의 알지 못함을 인식하는 것이 참 알음’이라는 의미는 같은 듯싶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굴이 전하는 지혜의 첫 가르침은 그렇게 시작합니다. ‘나는 사람이 아니라 우둔한 짐승이다’라는 고백으로 말입니다. 솔로몬 시대 최고의 지혜자로 손꼽히던 이가 아굴인데, 그가 어찌하여 짐승만도 못하단 말인가요? 자신의 모자람, 온전함에 이르기에는 여전히 부족한 자신에 대한 깨달음과 그에 대한 고백이진 셈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의 한계와 모자람을 깨닫는 자세가 지혜를 구하고 지혜를 최고로 아는 사람들의 자세입니다. 사람은 그런 부족함을 깨달을 때 비로소 구하게 마련입니다. 부족함을 많이 깨달을수록 그 간절함도 커지게 마련이지요. 결국 부족함을 깨닫는 것 만큼 그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셈입니다. 이는 성서 뿐 아니라 주역, 소크라테스도 가르쳤던 교훈입니다.
2. 존재의 근거와 방식
아굴은 본문을 통해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는 것에 이어 세상을 창조하신 이의 이름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바람을 손에 움켜쥐고 있고, 물을 그 옷자락으로 싸고 있고, 땅의 모든 경계선을 그은 사람’ 말입니다. 결국 우리가 딛고 있는 터전을 지으신 이를 일컫는 말씀이지요. 자신이 딛고 있는 터전을 지으신 이의 이름, 곧 존재의 근거에 대한 물음입니다. 존재의 근거에 대한 물음은 곧 그 분의 뜻으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아굴은 “하느님의 말씀은 모두 순결하며, 그분은 그를 의지하는 사람의 방패가 되신다”(5)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세상을 만드시고 운행하시는 그 분의 이름을 아는 것이 존재의 근거에 대한 깨달음이라면, 그 분의 뜻(말씀)을 구하고 깨닫는 일은 ‘존재의 방식’에 대한 영역일 터입니다. 절대자 앞에서 자신의 존재를 성찰하고, 절대자의 이름과 뜻을 통해 존재의 근거와 방식을 깨닫는 이, 그런 사람이 바로 지혜를 구하는 사람의 모습임을 아굴은 가르치고 있는 셈입니다. 아! 그러고 보니 모든 게 다 은총입니다. 그게 내 맘대로 되는 일이 아니니 하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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