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210 주님이 하느님이심을 알아라!
2013.12.10 07:04
||0||0131210 새벽 묵상
. 읽은 말씀: 시편100:1-5
. 내 용: 주님은 하느님이시다.
1. 우리를 지으시고 그의 백성으로 삼으신 주님, 그 주님이 바로 하느님이시다.
2. 그 주님께 찬양의 노래 감사의 노래를 드리는 자에게 임할 하느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
. 묵상 말씀: “너희는 주님이 하느님이심을 알아라”(시100:3).
1. 우리는 그의 것
‘피투성의 존재(Geworfenheit)’ 이는 독일 철학자, 칼 야스퍼스가 인간의 존재에 대한 본질과 근원을 말하며 사용한 표현입니다. 저절로 존재한 우연한 존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피투성(被投性)이란 누군가에 의해 던져진 존재요, 그 안에는 근원적인 존재가 있음을 전제합니다. 그 근원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 아니 정확하게 그 근원에 대하여 성찰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과의 차이, 그 차이가 바로 신앙과 비신앙과의 차이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이라는 인간의 의지에 대한 포기가 전제되기 때문이죠. 존재의 근원을 비본질적인 존재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게 피투성 존재의 한계입니다. 그 한계를 믿음이라는 영역으로 승화시키며 본질과 근원에 대한 성찰을 마무리할 줄 아는 존재가 곧 인간이 아닐까요? 오늘 본문에서 시인은 그 본질적인 근원을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주님이 하느님이심을 알아라”(3)는 말씀이 바로 그것이죠. 나의 주(主)님을 깨닫고 사는 것은 삶의 핵심입니다. 그것은 그 어떤 권세와 명예, 물질을 얻는 일보다 더 소중한 일입니다.
2. 알아라!
주님이 하느님이심을 “알아라”고 시인은 힘주어 말하고 있습니다. 깨달음에서 멈추지 말고 더 나아가야 할 내용이 있다는 뜻이지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신앙을 깨달음이라는 것에 머물게 할 경우가 참 많습니다. 여기에 니코스 카진스키스의 글을 옮겨봅니다. “넌 왜 여기 가만히 있느냐? 날 사랑한다면서 왜 팔짱을 끼고 조용히 편안하게 있느냐? 넌 먹고 마시고, 내가 한 말을 편안하게 읽고 십자가에 못 박힌 내 얘기에 눈물도 흘리고, 그리고 침대로 가서 잔다. 부끄럽지 않느냐? 그게 네가 날 사랑하는 방법이냐? 넌 그걸 사랑이라고 부르느냐? 일어나라!” 시인은 주님이신 그 분께 찬양의 노래, 감사의 노래를 부르라고 명령합니다. 우리의 몸은 어쩔 수없이 세상에 살지만 감사와 찬양의 노래를 통해 그 성문, 그 뜰로 들어갈 것을 명령합니다. 그 분의 영역으로 들어가라는 뜻이지요. 그런 사람들에게 주시는 선물을 또 가르칩니다. 선하심과 인자하심, 그 분의 성실하심입니다.(5) 믿을 수 없는 비본래적인 세상 속에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존재를 찾을 수 있다는 즐거움, 그 분이 주시는 평안과 복입니다.
. 읽은 말씀: 시편100:1-5
. 내 용: 주님은 하느님이시다.
1. 우리를 지으시고 그의 백성으로 삼으신 주님, 그 주님이 바로 하느님이시다.
2. 그 주님께 찬양의 노래 감사의 노래를 드리는 자에게 임할 하느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
. 묵상 말씀: “너희는 주님이 하느님이심을 알아라”(시100:3).
1. 우리는 그의 것
‘피투성의 존재(Geworfenheit)’ 이는 독일 철학자, 칼 야스퍼스가 인간의 존재에 대한 본질과 근원을 말하며 사용한 표현입니다. 저절로 존재한 우연한 존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피투성(被投性)이란 누군가에 의해 던져진 존재요, 그 안에는 근원적인 존재가 있음을 전제합니다. 그 근원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 아니 정확하게 그 근원에 대하여 성찰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과의 차이, 그 차이가 바로 신앙과 비신앙과의 차이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이라는 인간의 의지에 대한 포기가 전제되기 때문이죠. 존재의 근원을 비본질적인 존재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게 피투성 존재의 한계입니다. 그 한계를 믿음이라는 영역으로 승화시키며 본질과 근원에 대한 성찰을 마무리할 줄 아는 존재가 곧 인간이 아닐까요? 오늘 본문에서 시인은 그 본질적인 근원을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주님이 하느님이심을 알아라”(3)는 말씀이 바로 그것이죠. 나의 주(主)님을 깨닫고 사는 것은 삶의 핵심입니다. 그것은 그 어떤 권세와 명예, 물질을 얻는 일보다 더 소중한 일입니다.
2. 알아라!
주님이 하느님이심을 “알아라”고 시인은 힘주어 말하고 있습니다. 깨달음에서 멈추지 말고 더 나아가야 할 내용이 있다는 뜻이지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신앙을 깨달음이라는 것에 머물게 할 경우가 참 많습니다. 여기에 니코스 카진스키스의 글을 옮겨봅니다. “넌 왜 여기 가만히 있느냐? 날 사랑한다면서 왜 팔짱을 끼고 조용히 편안하게 있느냐? 넌 먹고 마시고, 내가 한 말을 편안하게 읽고 십자가에 못 박힌 내 얘기에 눈물도 흘리고, 그리고 침대로 가서 잔다. 부끄럽지 않느냐? 그게 네가 날 사랑하는 방법이냐? 넌 그걸 사랑이라고 부르느냐? 일어나라!” 시인은 주님이신 그 분께 찬양의 노래, 감사의 노래를 부르라고 명령합니다. 우리의 몸은 어쩔 수없이 세상에 살지만 감사와 찬양의 노래를 통해 그 성문, 그 뜰로 들어갈 것을 명령합니다. 그 분의 영역으로 들어가라는 뜻이지요. 그런 사람들에게 주시는 선물을 또 가르칩니다. 선하심과 인자하심, 그 분의 성실하심입니다.(5) 믿을 수 없는 비본래적인 세상 속에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존재를 찾을 수 있다는 즐거움, 그 분이 주시는 평안과 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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