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101 주님의 긍휼이 필요한 예루살렘
2013.11.01 06:55
||0||0131101 새벽 묵상
. 읽은 말씀: 시편79:1-13
. 내 용: 주님의 긍휼이 필요한 예루살렘
1. 예루살렘의 멸망을 주님에 대한 조롱과 모욕으로 판단하며 주님의 구원을 구함.
2. 주님의 구원으로 인해 주님의 긍휼하심과 영광스러운 이름, 명성을 이방인들에게 알려줄 것을 요구함.
. 묵상 말씀: “우리가 보는 앞에서 이방인들에게 알려주십시오”(시79:10).
1. 주님의 대사(大使)
본문은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과 그의 군대에 의해 능욕당하며 돌무더기로 변한 예루살렘을 생각하며 주님의 구원을 요구하는 민족애가(民族哀歌)요 비탄시입니다. 시인이 주님의 긍휼과 도우심을 요청하는 그 목적과 명분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우리가 보는 앞에서 이방인들에게 알려”(10)달라고 했습니다. 하느님의 살아계심과 그의 능력을 보여 달라는 것이죠. 왜 그래야할까요?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인한 자신들의 조롱과 모욕이 곧 하느님의 조롱과 모욕이 되었다는 시각입니다. 자신들이야 하느님의 심판과 징계로 인한 조롱과 모욕이지만, 그로 인하여 하느님이 이방인으로부터 “그들의 하느님이 어디에 있느냐?”(10)는 식으로 조롱과 모욕을 당하는 것을 송구스럽게 생각하는 모습입니다. 자신들의 모습을 통해 하느님께서 조롱을 당할 수도 있고 영광을 받으실 수도 있다는 것, 이는 우리가 생명을 다하는 날까지 새기고 살아야 할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주님의 대사(大使)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나라를 대표하는 대사 말입니다.
2. 남은 자(Remnant)
아무리 극악무도한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심판과 징계 속에는 사랑과 희망의 끈을 남겨 놓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항상, “최악의 경우에 최선의 경우를 준비”하신다는 뜻이지요. 하십니다. 이것이 아모스나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사4:2)를 통해 “남은 자 사상”으로 나타내기도 하였습니다. 노아 이야기의 경우, 노아와 그의 가족들을 남겨 놓으신 것이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바벨론 포로의 경우 사실상 이스라엘의 역사는 끝났고, 하느님의 구속사역도 그 전망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러나 뜻 밖에도 그 하느님의 구속 역사는 포로로 끌려간 다니엘이나 그의 친구들 같은 신앙의 일꾼들을 통해 그 이방 땅에서 이어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시인이 구하는 “하느님의 긍휼”(8)은 그러한 '남은 자 사상'에 근거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희생당한 이들을 묻어줄 이 조차 없는’(3) 그런 곳에서 시인은 희망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부르게 될 ‘감사와 찬양’에 대한 기대와 희망의 끈을 놓질 않고 있습니다. 믿음을 갖고 사는 이는 그래서, 한 치의 전망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감사와 찬양이 가능합니다.
. 읽은 말씀: 시편79:1-13
. 내 용: 주님의 긍휼이 필요한 예루살렘
1. 예루살렘의 멸망을 주님에 대한 조롱과 모욕으로 판단하며 주님의 구원을 구함.
2. 주님의 구원으로 인해 주님의 긍휼하심과 영광스러운 이름, 명성을 이방인들에게 알려줄 것을 요구함.
. 묵상 말씀: “우리가 보는 앞에서 이방인들에게 알려주십시오”(시79:10).
1. 주님의 대사(大使)
본문은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과 그의 군대에 의해 능욕당하며 돌무더기로 변한 예루살렘을 생각하며 주님의 구원을 요구하는 민족애가(民族哀歌)요 비탄시입니다. 시인이 주님의 긍휼과 도우심을 요청하는 그 목적과 명분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우리가 보는 앞에서 이방인들에게 알려”(10)달라고 했습니다. 하느님의 살아계심과 그의 능력을 보여 달라는 것이죠. 왜 그래야할까요?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인한 자신들의 조롱과 모욕이 곧 하느님의 조롱과 모욕이 되었다는 시각입니다. 자신들이야 하느님의 심판과 징계로 인한 조롱과 모욕이지만, 그로 인하여 하느님이 이방인으로부터 “그들의 하느님이 어디에 있느냐?”(10)는 식으로 조롱과 모욕을 당하는 것을 송구스럽게 생각하는 모습입니다. 자신들의 모습을 통해 하느님께서 조롱을 당할 수도 있고 영광을 받으실 수도 있다는 것, 이는 우리가 생명을 다하는 날까지 새기고 살아야 할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주님의 대사(大使)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나라를 대표하는 대사 말입니다.
2. 남은 자(Remnant)
아무리 극악무도한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심판과 징계 속에는 사랑과 희망의 끈을 남겨 놓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항상, “최악의 경우에 최선의 경우를 준비”하신다는 뜻이지요. 하십니다. 이것이 아모스나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사4:2)를 통해 “남은 자 사상”으로 나타내기도 하였습니다. 노아 이야기의 경우, 노아와 그의 가족들을 남겨 놓으신 것이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바벨론 포로의 경우 사실상 이스라엘의 역사는 끝났고, 하느님의 구속사역도 그 전망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러나 뜻 밖에도 그 하느님의 구속 역사는 포로로 끌려간 다니엘이나 그의 친구들 같은 신앙의 일꾼들을 통해 그 이방 땅에서 이어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시인이 구하는 “하느님의 긍휼”(8)은 그러한 '남은 자 사상'에 근거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희생당한 이들을 묻어줄 이 조차 없는’(3) 그런 곳에서 시인은 희망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부르게 될 ‘감사와 찬양’에 대한 기대와 희망의 끈을 놓질 않고 있습니다. 믿음을 갖고 사는 이는 그래서, 한 치의 전망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감사와 찬양이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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