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503 욥을 고발하는 엘리후
2013.05.03 06:15
||0||0130503 새벽 묵상
. 읽은 말씀: 욥기34:1-15
. 내 용: 엘리후가 욥의 세 친구에게 하는 말
1. 욥의 세 친구에게 욥에 대하여 언급하는 엘리후.
2. 욥에 대하여 ‘하느님을 불의한 분으로 주장하고 조롱하고 있다’고 주장함.
3. 그러나 하느님은 공의로우시고 온전하신 분임을 언급함.
. 묵상 말씀: “전능하신 하느님은 악한 일이나, 정의를 그르치는 일은, 하지 않으십니다”(욥34:12).
1. 엘리후라는 사람
욥의 세 친구와는 다른 시각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 기대를 했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그러한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고난을 당하는 욥에게 더 큰 고난을 안겨주고 있는 모습입니다. 고난을 당하는 욥에게도 모자라 욥의 세 친구에게 고발하는 열정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문제는 상황을 왜곡시키고 있다는 점입니다. 욥을 ‘하느님을 조롱하는 사람’으로, 또한 ‘악한 사람들과 몰려다니며 하느님을 불의한 분으로 만드는 사람’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제 뜻 모를 고난에 대하여 하느님의 뜻을 기다리며 호소하면서 고난에 대한 의미가 정리가 되어가는 시점입니다. 그런데 엘리후라는 사람이 나타나 문제를 악화시키는 모습입니다. 세상에 하느님의 뜻이 스며들지 않은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만, 당사지인 욥에게 있어 엘리후라는 사람은 고통이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역시 하늘 아래 새것이 없습니다. 사람의 지혜나 지식은 정말 의지할 게 못 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됩니다.
2. 위로자의 태도
어디 뭐, 남 말 할 필요가 있나요?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며 살펴야 할 때입니다. 분명, 엘리후는 고난당하는 욥을 돕기 위한 사람으로 등장했을 텐데, 그 본분을 심각하게 망각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어떻게 하면 욥을 위로하고 힘을 북돋아 다시금 그의 삶을 회복시킬 수 있을 것인지를 성찰했어야 합니다. 어쩌면 욥기를 전하는 기자의 편집의도와는 좀 다를 수도 있지만 말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내용으로 보면 정말 문제가 있는 사람은 욥보다도 엘리후라는 사람입니다. 엘리후는 욥을 고발하면서 어느덧 재판관과 심판자의 자리를 꿰차고 앉았습니다.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자리는 우리의 자리가 아닙니다. 특히 남을 위로하는 자의 자리는 결코 아닙니다. 성서에서 그런 자리는 하느님의 영역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말하고 있지만 그의 발언 내용은 분명 자신이 하느님을 대신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일만 아뢸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각 자기 일을 하나님께 사실대로 아뢰어야 할 것입니다”(롬14:12).
. 읽은 말씀: 욥기34:1-15
. 내 용: 엘리후가 욥의 세 친구에게 하는 말
1. 욥의 세 친구에게 욥에 대하여 언급하는 엘리후.
2. 욥에 대하여 ‘하느님을 불의한 분으로 주장하고 조롱하고 있다’고 주장함.
3. 그러나 하느님은 공의로우시고 온전하신 분임을 언급함.
. 묵상 말씀: “전능하신 하느님은 악한 일이나, 정의를 그르치는 일은, 하지 않으십니다”(욥34:12).
1. 엘리후라는 사람
욥의 세 친구와는 다른 시각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 기대를 했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그러한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고난을 당하는 욥에게 더 큰 고난을 안겨주고 있는 모습입니다. 고난을 당하는 욥에게도 모자라 욥의 세 친구에게 고발하는 열정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문제는 상황을 왜곡시키고 있다는 점입니다. 욥을 ‘하느님을 조롱하는 사람’으로, 또한 ‘악한 사람들과 몰려다니며 하느님을 불의한 분으로 만드는 사람’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제 뜻 모를 고난에 대하여 하느님의 뜻을 기다리며 호소하면서 고난에 대한 의미가 정리가 되어가는 시점입니다. 그런데 엘리후라는 사람이 나타나 문제를 악화시키는 모습입니다. 세상에 하느님의 뜻이 스며들지 않은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만, 당사지인 욥에게 있어 엘리후라는 사람은 고통이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역시 하늘 아래 새것이 없습니다. 사람의 지혜나 지식은 정말 의지할 게 못 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됩니다.
2. 위로자의 태도
어디 뭐, 남 말 할 필요가 있나요?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며 살펴야 할 때입니다. 분명, 엘리후는 고난당하는 욥을 돕기 위한 사람으로 등장했을 텐데, 그 본분을 심각하게 망각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어떻게 하면 욥을 위로하고 힘을 북돋아 다시금 그의 삶을 회복시킬 수 있을 것인지를 성찰했어야 합니다. 어쩌면 욥기를 전하는 기자의 편집의도와는 좀 다를 수도 있지만 말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내용으로 보면 정말 문제가 있는 사람은 욥보다도 엘리후라는 사람입니다. 엘리후는 욥을 고발하면서 어느덧 재판관과 심판자의 자리를 꿰차고 앉았습니다.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자리는 우리의 자리가 아닙니다. 특히 남을 위로하는 자의 자리는 결코 아닙니다. 성서에서 그런 자리는 하느님의 영역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말하고 있지만 그의 발언 내용은 분명 자신이 하느님을 대신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일만 아뢸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각 자기 일을 하나님께 사실대로 아뢰어야 할 것입니다”(롬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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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생각이 고난중인 욥의 입장과
함부로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려는 것(하느님의영역을 침범)의 심각성을 간과한 것 같습니다.
함부로 남을 판단하고 단정지어 생각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