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415 소발의 두 번째 조언
2013.04.15 06:39
||0||0130415 새벽 묵상
. 읽은 말씀: 욥기20:1-29
. 내 용: 소발의 두 번째 조언
1. 소발의 첫 마디는 악인이 일시적으로 번영할 수 있다는 것.(1-11)
2. 그러나 악인은 필연적으로 파멸하며(12-19), 하느님은 악인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함(20-29).
. 묵상 말씀: “그가 재앙을 만나고 온갖 불운이 그에게 밀어닥칠 것이다”(욥20:22).
1. 화가 나서 한 말
소발은 욥의 친구입니다. 처음 일주일 동안은 조용히 찾아와 말없이 함께 했던 친구입니다. 그러나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욥의 혼란과 고통은 더욱 커졌습니다. 차라리 말 없을 때가 더 나았을 듯싶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소발이 두 번째 조언을 하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이치에 맞는 말들입니다. 악인은 잠시 번영할 수 있으나, 결국 망한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그에게는 하느님의 심판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처지와 몰골을 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욥 앞에서 악인의 비참한 말로를 말하는 의도는 뻔합니다. 욥이 당하는 고난이 바로 그러한 악행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말과 행위를 보여준 셈입니다. 특별히 첫 번째 조언(11장)보다 그 농도가 더 세졌습니다. 욥에게 회개를 촉구하면서 희망을 이야기 했지만(11:17) 20장에서는 아예 그런 말이 자취를 감추고 있습니다. 그렇게 더 나빠진 이유가 있습니다. 소발이 서두에 밝힌 대로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어 한 말(2)이기 때문입니다.
2. 너 자신을 알라
소크라테스(B.C. 470~399)의 경구로 알려진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신의 무지에 대한 인식이 참지식의 출발이라는 뜻이기도 하지요. 철학적 주제들이 우주와 자연에 머물던 시대에 그 주제가 "인간"으로 바뀌던 시대에 생긴 말이기도 합니다. 사실 이 말은 델피 신전에 이미 새겨져 있던 말인데, 소크라테스가 자주 인용하면서 소크라테스의 경구로 알려진 면도 있다고 합니다. “너 자신을 알라”는 이 말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이기도 합니다. 특히 하느님의 말씀을 읽거나 인용할 때 새겨들어야 할 말씀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소발이 친구 욥에게 하는 말들을 보면 구구절절 다 지당하신 말씀들입니다. 그런데 그 지당하신 말씀이 지당하게 사용되고 있질 못하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옛 성현들의 말씀도 그러하듯, 하느님 말씀도 자신을 성찰하라고 주신 말씀이지 남을 정죄하고 비판하라고 주신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말씀 앞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에 대한 성찰과 고백일 뿐, 누구도 정죄하거나 비판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영역이 아닙니다.
. 읽은 말씀: 욥기20:1-29
. 내 용: 소발의 두 번째 조언
1. 소발의 첫 마디는 악인이 일시적으로 번영할 수 있다는 것.(1-11)
2. 그러나 악인은 필연적으로 파멸하며(12-19), 하느님은 악인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함(20-29).
. 묵상 말씀: “그가 재앙을 만나고 온갖 불운이 그에게 밀어닥칠 것이다”(욥20:22).
1. 화가 나서 한 말
소발은 욥의 친구입니다. 처음 일주일 동안은 조용히 찾아와 말없이 함께 했던 친구입니다. 그러나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욥의 혼란과 고통은 더욱 커졌습니다. 차라리 말 없을 때가 더 나았을 듯싶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소발이 두 번째 조언을 하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이치에 맞는 말들입니다. 악인은 잠시 번영할 수 있으나, 결국 망한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그에게는 하느님의 심판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처지와 몰골을 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욥 앞에서 악인의 비참한 말로를 말하는 의도는 뻔합니다. 욥이 당하는 고난이 바로 그러한 악행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말과 행위를 보여준 셈입니다. 특별히 첫 번째 조언(11장)보다 그 농도가 더 세졌습니다. 욥에게 회개를 촉구하면서 희망을 이야기 했지만(11:17) 20장에서는 아예 그런 말이 자취를 감추고 있습니다. 그렇게 더 나빠진 이유가 있습니다. 소발이 서두에 밝힌 대로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어 한 말(2)이기 때문입니다.
2. 너 자신을 알라
소크라테스(B.C. 470~399)의 경구로 알려진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신의 무지에 대한 인식이 참지식의 출발이라는 뜻이기도 하지요. 철학적 주제들이 우주와 자연에 머물던 시대에 그 주제가 "인간"으로 바뀌던 시대에 생긴 말이기도 합니다. 사실 이 말은 델피 신전에 이미 새겨져 있던 말인데, 소크라테스가 자주 인용하면서 소크라테스의 경구로 알려진 면도 있다고 합니다. “너 자신을 알라”는 이 말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이기도 합니다. 특히 하느님의 말씀을 읽거나 인용할 때 새겨들어야 할 말씀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소발이 친구 욥에게 하는 말들을 보면 구구절절 다 지당하신 말씀들입니다. 그런데 그 지당하신 말씀이 지당하게 사용되고 있질 못하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옛 성현들의 말씀도 그러하듯, 하느님 말씀도 자신을 성찰하라고 주신 말씀이지 남을 정죄하고 비판하라고 주신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말씀 앞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에 대한 성찰과 고백일 뿐, 누구도 정죄하거나 비판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영역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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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을 돌이켜 봅니다.
겸손과 겸허함을 간구하며 활기찬 한 주의 생활을 시작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