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404 욥의 기도
2013.04.04 06:30
||0||0130404 새벽 묵상
. 읽은 말씀: 욥기13:20-28
. 내 용: 욥의 기도
1. 자신을 치시는 하느님의 손을 거두어 주실 것과 두려워 떨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를 드림.
2. 그러면서 인과응보론적인 관점에서 하느님께 불만을 쏟아놓는 욥-“어찌하여 주님께서 나를 원수로 여기십니까?
. 묵상 말씀: “제발 내가 이렇게 두려워 떨지 않게 해주십시오”(욥13:21).
1. 파트너를 바꾼 욥
지금까지 욥은 자신을 정죄하는 듯한 충고와 조언을 해주던 친구들과 대화를 해왔습니다. 그들의 충고와 조언은 진지했지만 자신들의 지식과 경험의 한계를 전혀 극복하지 못한 철저한 인위적인 원리와 가치였기에, 욥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질 못했던 것입니다. 오히려 욥의 아픔과 고통이 더해졌을 뿐입니다. 그러한 친구들에게 욥은 자신의 결백과 무죄함, 그리고 뜻하지 않은 고통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며 탄식과 불만을 토로해왔던 터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의 눈길은 하느님에게로 향하기 시작했습니다. 대화의 상대가 친구들에게서 하느님께로 바뀐 것입니다. 파트너를 바꾼다는 것은 단순히 대화의 상대를 바꾼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존재합니다. 시각과 관점을 바꾼다는 것입니다. 한곳에서만 바라보다가 이제 장소를 바꿔 다른 곳에서 풍경을 바라보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일차원의 세계와 3차원, 4차원의 세계는 다릅니다. 다양한 관점은 진실을 파악하는데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2. 여전한 욥의 한계
그렇게 대화의 상대를 바꿨지만 욥은 여전히 인식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느님에 대하여 ‘자신을 원수로 여기신다’고 하고 ‘나를 공격한다’고 했습니다. 나아가 ‘내 어릴 적 일까지 찾아내어 나를 고발하시는 하느님’으로 불평하고 있습니다. 물론 자신의 극심한 고통에 대한 문학적인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만, 도가 지나치고 그동안 욥이 보여준 신앙적인 태도와 다른 느낌으로 와 닿습니다. 왜 그렇게 된 걸까요? 오늘 본문에서 욥이 하느님을 향해 언급한 내용도 사실, 인과응보론과 다를 바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잘못한 게 있으니 벌을 받는 것’이라는 친구들의 인식이나 ‘내가 잘못한 게 없는데 왜,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라는 욥의 인식에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친구들의 그러한 인식이 욥의 고통을 가중시켰듯이 욥의 그러한 인식 또한 욥 자신을 더욱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왜곡(24~27절)하면서 말입니다. 욥이 친구들을 나무라지만 욥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인식을 절대화시키는 오류 말입니다.
. 읽은 말씀: 욥기13:20-28
. 내 용: 욥의 기도
1. 자신을 치시는 하느님의 손을 거두어 주실 것과 두려워 떨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를 드림.
2. 그러면서 인과응보론적인 관점에서 하느님께 불만을 쏟아놓는 욥-“어찌하여 주님께서 나를 원수로 여기십니까?
. 묵상 말씀: “제발 내가 이렇게 두려워 떨지 않게 해주십시오”(욥13:21).
1. 파트너를 바꾼 욥
지금까지 욥은 자신을 정죄하는 듯한 충고와 조언을 해주던 친구들과 대화를 해왔습니다. 그들의 충고와 조언은 진지했지만 자신들의 지식과 경험의 한계를 전혀 극복하지 못한 철저한 인위적인 원리와 가치였기에, 욥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질 못했던 것입니다. 오히려 욥의 아픔과 고통이 더해졌을 뿐입니다. 그러한 친구들에게 욥은 자신의 결백과 무죄함, 그리고 뜻하지 않은 고통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며 탄식과 불만을 토로해왔던 터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의 눈길은 하느님에게로 향하기 시작했습니다. 대화의 상대가 친구들에게서 하느님께로 바뀐 것입니다. 파트너를 바꾼다는 것은 단순히 대화의 상대를 바꾼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존재합니다. 시각과 관점을 바꾼다는 것입니다. 한곳에서만 바라보다가 이제 장소를 바꿔 다른 곳에서 풍경을 바라보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일차원의 세계와 3차원, 4차원의 세계는 다릅니다. 다양한 관점은 진실을 파악하는데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2. 여전한 욥의 한계
그렇게 대화의 상대를 바꿨지만 욥은 여전히 인식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느님에 대하여 ‘자신을 원수로 여기신다’고 하고 ‘나를 공격한다’고 했습니다. 나아가 ‘내 어릴 적 일까지 찾아내어 나를 고발하시는 하느님’으로 불평하고 있습니다. 물론 자신의 극심한 고통에 대한 문학적인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만, 도가 지나치고 그동안 욥이 보여준 신앙적인 태도와 다른 느낌으로 와 닿습니다. 왜 그렇게 된 걸까요? 오늘 본문에서 욥이 하느님을 향해 언급한 내용도 사실, 인과응보론과 다를 바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잘못한 게 있으니 벌을 받는 것’이라는 친구들의 인식이나 ‘내가 잘못한 게 없는데 왜,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라는 욥의 인식에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친구들의 그러한 인식이 욥의 고통을 가중시켰듯이 욥의 그러한 인식 또한 욥 자신을 더욱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왜곡(24~27절)하면서 말입니다. 욥이 친구들을 나무라지만 욥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인식을 절대화시키는 오류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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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보는 나의 꼬락서니 하고는.....
삶의 현실과 세상을 향한 나의 관점도
하느님께로 바꾸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