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221 납득과 수용 사이
2011.12.21 07:22
||0||0111221 새벽묵상
. 읽은 말씀: 사무엘상27:1-12
. 내 용: 다시 블레셋으로 망명한 다윗
1. 자신이 살아날 길을 모색하던 다윗, 다시 블레셋으로 망명을 함
2. 아기스 왕에게로 간 다윗은 한 성읍(시글락)을 구했고 그곳에서 다윗은 평소에 유다를 괴롭히던 그술과 기르스, 아말렉 사람들을 습격하고 약탈함
3. 아기스 왕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아기스 왕은 다윗을 믿고 신뢰함
. 묵상 말씀: “다윗은 블레셋 사람의 지역에 거주하는 동안, 언제나 이런 식으로 처신하였다.”(삼상27:11)
1. 또 다시 블레셋으로 망명한 다윗
아기스 왕에게로 망명을 한 것은, 성서에 나타난 바로는 두 번째입니다. 이미 21장에서 아기스 왕에게로 피신해 갔으나, 다윗을 알아보는 사람들 앞에서 미친척하여 쫓겨난 바 있습니다.(21장) 다시 블레셋으로 간 것은 사울 왕으로부터 피신하기에 가장 안전한 곳으로 판단했기 때문인 듯싶습니다. 문제는 그 곳에서의 처신입니다. 1차 망명 때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미친척하여 쫓겨나는 수모를 당했습니다. 두 번째 망명에서는 거짓말을 하며 목숨을 부지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다를 괴롭히던 아멜렉과 그술, 기르스 사람들을 치고 약탈했으나 아기스 왕에겐 다윗의 동족(유다의 남쪽, 여라무엘 족속, 겐 족속)을 친 것처럼 거짓말을 했던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이러한 다윗의 처신에 대하여 “다윗은 블레셋 사람의 지역에 거주하는 동안, 언제나 이런 식으로 처신하였다.”(삼상27:11)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이런 식’과 같은 표현은 한 두 번이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평소의 다윗답지 않은 태도가 분명합니다.
2. 납득과 수용 사이
다윗 자신이 표현했듯이 할례 받지 않은 민족이요, 하느님을 모독하는 그런 민족입니다. 아무리 목숨 부지가 중요해도 블레셋으로 피신하는 것은 납득은 되지만 수용이 되질 않습니다. 또한 거기서 ‘언제나’, ‘그런 식’으로 거짓말을 하며 목숨을 부지하는 것 또한 납득은 되지만 수용이 되질 않습니다. 납득이 되는 영역은 상식적인 판단이요, '이방인과 세리도 할 줄 아는 수준'(마5:46-47)입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들에겐 '납득' 수준, 그 이상의 수준이 필요한 게 아닐까요? 하느님의 관점에서 '수용'되는 그런 수준 말입니다. 결국, 납득 수준에 머물렀던 다윗이 블레셋 시글락에 머물렀던 1년 4개월 간의 행보는 그리 유쾌한 흔적을 남기질 못했습니다. 그 기간 동안 남긴 찬양과 시를 한 편도 남기지 못했다는 게 그것을 증명합니다.
. 읽은 말씀: 사무엘상27:1-12
. 내 용: 다시 블레셋으로 망명한 다윗
1. 자신이 살아날 길을 모색하던 다윗, 다시 블레셋으로 망명을 함
2. 아기스 왕에게로 간 다윗은 한 성읍(시글락)을 구했고 그곳에서 다윗은 평소에 유다를 괴롭히던 그술과 기르스, 아말렉 사람들을 습격하고 약탈함
3. 아기스 왕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아기스 왕은 다윗을 믿고 신뢰함
. 묵상 말씀: “다윗은 블레셋 사람의 지역에 거주하는 동안, 언제나 이런 식으로 처신하였다.”(삼상27:11)
1. 또 다시 블레셋으로 망명한 다윗
아기스 왕에게로 망명을 한 것은, 성서에 나타난 바로는 두 번째입니다. 이미 21장에서 아기스 왕에게로 피신해 갔으나, 다윗을 알아보는 사람들 앞에서 미친척하여 쫓겨난 바 있습니다.(21장) 다시 블레셋으로 간 것은 사울 왕으로부터 피신하기에 가장 안전한 곳으로 판단했기 때문인 듯싶습니다. 문제는 그 곳에서의 처신입니다. 1차 망명 때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미친척하여 쫓겨나는 수모를 당했습니다. 두 번째 망명에서는 거짓말을 하며 목숨을 부지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다를 괴롭히던 아멜렉과 그술, 기르스 사람들을 치고 약탈했으나 아기스 왕에겐 다윗의 동족(유다의 남쪽, 여라무엘 족속, 겐 족속)을 친 것처럼 거짓말을 했던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이러한 다윗의 처신에 대하여 “다윗은 블레셋 사람의 지역에 거주하는 동안, 언제나 이런 식으로 처신하였다.”(삼상27:11)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이런 식’과 같은 표현은 한 두 번이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평소의 다윗답지 않은 태도가 분명합니다.
2. 납득과 수용 사이
다윗 자신이 표현했듯이 할례 받지 않은 민족이요, 하느님을 모독하는 그런 민족입니다. 아무리 목숨 부지가 중요해도 블레셋으로 피신하는 것은 납득은 되지만 수용이 되질 않습니다. 또한 거기서 ‘언제나’, ‘그런 식’으로 거짓말을 하며 목숨을 부지하는 것 또한 납득은 되지만 수용이 되질 않습니다. 납득이 되는 영역은 상식적인 판단이요, '이방인과 세리도 할 줄 아는 수준'(마5:46-47)입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들에겐 '납득' 수준, 그 이상의 수준이 필요한 게 아닐까요? 하느님의 관점에서 '수용'되는 그런 수준 말입니다. 결국, 납득 수준에 머물렀던 다윗이 블레셋 시글락에 머물렀던 1년 4개월 간의 행보는 그리 유쾌한 흔적을 남기질 못했습니다. 그 기간 동안 남긴 찬양과 시를 한 편도 남기지 못했다는 게 그것을 증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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