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319 엘리바스의 영적 체험
2013.03.19 08:59
||0||0130319 새벽 묵상
. 읽은 말씀: 욥기4:12-21
. 내 용: 엘리바스의 간증
1. 욥에게 인과응보 논리로 충고하던 엘리바스가 “어떤 영”을 만나서 들은 소리를 전함.
2. 그 영으로부터 ‘불의한 인생들과 연약함, 그리고 육체적 정신적 한계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사실을 전함.
. 묵상 말씀: “어떤 영이 내 앞을 지나가니,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욥4:15).
1. 신비주의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이는 세상 모든 생명체와 인간의 차이를 정하는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자유 속에는 그 자유를 느끼고 누릴 수 있는 과정과 수단이 있어야 합니다. 그게 바로 인간의 이성입니다. 논리적인 사고와 표현을 할 수 있는 지적 능력과 의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고하고 표현하는 데 있어서 그것을 견인해 낼 장치가 필요합니다. 그것을 생략하는 순간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왜곡하고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그것을 생략하려는 유혹은 창조 이후 계속되는 유혹의 본질적인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에 엘리바스가 어떤 영적 체험을 한 내용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영적 체험은 소중한 경험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영적 체험이 곧 자신의 절대적 가치가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영적 체험 속에 담긴 주관적 모습과 판단 때문입니다. 따라서 엘리바스는 의미의 추출과 적용이라는 과정과 절차를 먼저 밟아야 했습니다. 어떤 영의 소리가 곧 절대적 진리나 가치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2. 신비주의 오류
우리에게 주어진 권리와 의무를 포기하게 하는 유혹, 그것은 우리 안에 나태와 게으름이라는 것으로 포장된 채 잠재되어있습니다. 초자연적인 힘에 대한 동경은 좋습니다만 그것이 인간을 수동적인 존재로 만든다면 그것은 분명 하느님의 뜻은 아닙니다. 신비주의가 의미는 있습니다만, 그런 면에서 많은 문제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엘리바스는 자신이 체험한 영적 체험을 근거로 욥에게 조언을 하고 있습니다만, 그의 주관적인 체험과 판단은 결코 욥에게 도움을 주지 못했습니다. 무성한 말잔치 속에서는 고난의 의미를 찾아내고 성찰하게 하기보다 자기의 주관적 체험에 대한 확신에 찬 교만하기 짝이 없는 엘리바스의 모습만 눈에 비칩니다. 하느님의 말씀과 영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듭니다. 그런 영을 받은 이에게서는 인간이 감내하기 힘든 고통 중에 있는 친구를 향해 꾸짖는 듯한 언사가 나올 수 없습니다. 눈을 부라리고 현란한 문장을 구사하며 자신의 영적 체험을 토대로 욥을 정죄하는 모습, 그게 신비주의의 오류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 읽은 말씀: 욥기4:12-21
. 내 용: 엘리바스의 간증
1. 욥에게 인과응보 논리로 충고하던 엘리바스가 “어떤 영”을 만나서 들은 소리를 전함.
2. 그 영으로부터 ‘불의한 인생들과 연약함, 그리고 육체적 정신적 한계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사실을 전함.
. 묵상 말씀: “어떤 영이 내 앞을 지나가니,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욥4:15).
1. 신비주의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이는 세상 모든 생명체와 인간의 차이를 정하는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자유 속에는 그 자유를 느끼고 누릴 수 있는 과정과 수단이 있어야 합니다. 그게 바로 인간의 이성입니다. 논리적인 사고와 표현을 할 수 있는 지적 능력과 의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고하고 표현하는 데 있어서 그것을 견인해 낼 장치가 필요합니다. 그것을 생략하는 순간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왜곡하고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그것을 생략하려는 유혹은 창조 이후 계속되는 유혹의 본질적인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에 엘리바스가 어떤 영적 체험을 한 내용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영적 체험은 소중한 경험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영적 체험이 곧 자신의 절대적 가치가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영적 체험 속에 담긴 주관적 모습과 판단 때문입니다. 따라서 엘리바스는 의미의 추출과 적용이라는 과정과 절차를 먼저 밟아야 했습니다. 어떤 영의 소리가 곧 절대적 진리나 가치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2. 신비주의 오류
우리에게 주어진 권리와 의무를 포기하게 하는 유혹, 그것은 우리 안에 나태와 게으름이라는 것으로 포장된 채 잠재되어있습니다. 초자연적인 힘에 대한 동경은 좋습니다만 그것이 인간을 수동적인 존재로 만든다면 그것은 분명 하느님의 뜻은 아닙니다. 신비주의가 의미는 있습니다만, 그런 면에서 많은 문제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엘리바스는 자신이 체험한 영적 체험을 근거로 욥에게 조언을 하고 있습니다만, 그의 주관적인 체험과 판단은 결코 욥에게 도움을 주지 못했습니다. 무성한 말잔치 속에서는 고난의 의미를 찾아내고 성찰하게 하기보다 자기의 주관적 체험에 대한 확신에 찬 교만하기 짝이 없는 엘리바스의 모습만 눈에 비칩니다. 하느님의 말씀과 영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듭니다. 그런 영을 받은 이에게서는 인간이 감내하기 힘든 고통 중에 있는 친구를 향해 꾸짖는 듯한 언사가 나올 수 없습니다. 눈을 부라리고 현란한 문장을 구사하며 자신의 영적 체험을 토대로 욥을 정죄하는 모습, 그게 신비주의의 오류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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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