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502 엘리후의 고난관
2013.05.02 06:19
||0||0130502 새벽 묵상
. 읽은 말씀: 욥기33:17-33
. 내 용: 엘리후의 고난관(觀)
1. 하느님은 사람들이 죄를 짓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 질병이나 육체의 고통을 통해 잘못을 고쳐주시는 분임을 언급함.
2. 그 일을 감당하기 위해 중보자(천사 천 명 가운데서 한 명)의 역할을 언급함.
. 묵상 말씀:“이 모두가 하느님이 하시는 일입니다”(욥33:29).
1. 하느님의 하시는 일
엘리후는 확실히 욥의 세 친구와는 다른 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고난을 바라보고 대하는 태도가 다르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고난에 대하여 하느님의 심판이라는 차원에서 바라보던 욥의 세 친구와는 달리 훨씬 다양하고 포괄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즉 고난을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뜻에 그 방점을 찍고 있다는 점이 바로 그것입니다. 고난의 배경이 심판일 수도 있지만 포괄적인 차원에서 하느님의 선하신 뜻을 강조하고 있는 셈입니다. 여기서 중보자의 역할도 등장하고 있는 점이 흥미롭습니다.(23-24절) 하느님이 중보자를 통해서 당신이 이루고자 하시는 바를 반드시 이루신다는 것이지요. 그 속에 담긴 하느님의 진정성과 열정을 느낍니다. 그러한 하느님의 뜻을 깨닫는 것, 어쩌면 이게 고난이 주는 최고의 선물이자 혜택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문제는 그러한 고난에 대한 성찰이지요. 아무나 다 그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2. 창조적 대안
고난 앞에서 사람들은 주로 두 가지 태도를 보입니다. 하나는 절망하고 포기하는 것입니다. 이는 고난이 재앙이 되는 경우입니다. 또 하나는 고난 앞에서 저항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무죄와 결백만을 주장했던 초기 욥의 태도가 바로 이런 경우입니다. 또 하나의 모습이 있습니다. 그 고난을 통해 새로운 삶의 영역을 개척해 나가는 것이지요. 바로 창조적인 대안인 셈입니다. 포로 시대라는 암울한 시대를 거치면서 회당을 만들고 경전문학을 꽃피웠던 유대인들의 경우가 바로 그 경우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엘리후는 중보자를 보내시면서 까지 당신의 뜻을 이루고자 하시는 하느님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하느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는 무엇일까요? 궁극적으로 “이 모두가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다”(29)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 고백을 할 수만 있다면 그에게 고난은 축복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본질적으로 하느님의 뜻을 선하다고 믿기 때문이지요. 그런 고백을 통해 자신의 의식과 신앙을 한층 더 진전시키는 일, 그게 바로 고난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하느님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읽은 말씀: 욥기33:17-33
. 내 용: 엘리후의 고난관(觀)
1. 하느님은 사람들이 죄를 짓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 질병이나 육체의 고통을 통해 잘못을 고쳐주시는 분임을 언급함.
2. 그 일을 감당하기 위해 중보자(천사 천 명 가운데서 한 명)의 역할을 언급함.
. 묵상 말씀:“이 모두가 하느님이 하시는 일입니다”(욥33:29).
1. 하느님의 하시는 일
엘리후는 확실히 욥의 세 친구와는 다른 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고난을 바라보고 대하는 태도가 다르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고난에 대하여 하느님의 심판이라는 차원에서 바라보던 욥의 세 친구와는 달리 훨씬 다양하고 포괄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즉 고난을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뜻에 그 방점을 찍고 있다는 점이 바로 그것입니다. 고난의 배경이 심판일 수도 있지만 포괄적인 차원에서 하느님의 선하신 뜻을 강조하고 있는 셈입니다. 여기서 중보자의 역할도 등장하고 있는 점이 흥미롭습니다.(23-24절) 하느님이 중보자를 통해서 당신이 이루고자 하시는 바를 반드시 이루신다는 것이지요. 그 속에 담긴 하느님의 진정성과 열정을 느낍니다. 그러한 하느님의 뜻을 깨닫는 것, 어쩌면 이게 고난이 주는 최고의 선물이자 혜택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문제는 그러한 고난에 대한 성찰이지요. 아무나 다 그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2. 창조적 대안
고난 앞에서 사람들은 주로 두 가지 태도를 보입니다. 하나는 절망하고 포기하는 것입니다. 이는 고난이 재앙이 되는 경우입니다. 또 하나는 고난 앞에서 저항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무죄와 결백만을 주장했던 초기 욥의 태도가 바로 이런 경우입니다. 또 하나의 모습이 있습니다. 그 고난을 통해 새로운 삶의 영역을 개척해 나가는 것이지요. 바로 창조적인 대안인 셈입니다. 포로 시대라는 암울한 시대를 거치면서 회당을 만들고 경전문학을 꽃피웠던 유대인들의 경우가 바로 그 경우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엘리후는 중보자를 보내시면서 까지 당신의 뜻을 이루고자 하시는 하느님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하느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는 무엇일까요? 궁극적으로 “이 모두가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다”(29)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 고백을 할 수만 있다면 그에게 고난은 축복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본질적으로 하느님의 뜻을 선하다고 믿기 때문이지요. 그런 고백을 통해 자신의 의식과 신앙을 한층 더 진전시키는 일, 그게 바로 고난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하느님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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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느님은 병주고 약주시는 하느님인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도 그렇고 우리의 삶속에서도 왜 자꾸 넘어뜨려 놓으시고
다시 일으켜 세우시는가?'
라는 생각을 많이 했었는데 오늘 말씀을 통해 희미하게나마 안개가 걷히는 걸 느낍니다.
고난앞에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마음속의 회당을 만들며 개척해 나가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