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318 욥의 친구, 엘리바스의 충고
2013.03.18 06:45
||0||0130318 새벽 묵상
. 읽은 말씀: 욥기4:1-11
. 내 용: 친구 엘리바스의 충고
1. 욥의 탄식이 마무리되면서 욥의 친구 데만 사람 엘리바스의 충고가 시작됨.
2. 엘리바스는 고난당한 사람들을 돕던 욥이 막상 자신의 고난 앞에서 좌절하는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움을 표시함.
3. 욥이 당하는 고통은 욥이 뿌린 씨앗이라는 사실을 지적함.
. 묵상 말씀: “잘 생각해 보아라. 죄 없는 사람이 망한 일이 있더냐? 정직한 사람이 멸망한 일이 있더냐?”(욥4:7).
1. 인과응보론
‘인과응보론因果應報論’은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그에 따르는 결과가 있다는 뜻입니다. 선한 원인에는 반드시 선한 결과가 따르며, 악한 원인에는 악한 결과가 따른다는 원리이기도 하죠. 오늘 본문에서 욥의 친구 엘리바스는 그러한 논리로 욥을 추궁(?)하고 있습니다. 욥이 아무 잘못 없이 고통을 당할 리 만무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뭘 어쩌라는 말일까요? 정말, 우리가 당하는 고통이 꼭 우리가 뿌린 씨앗 때문일까요? 오늘 욥의 친구가 내린 욥의 고난에 대한 분석과 처방은 좀 문제가 있습니다. 우선, 세상적인 논리를 너무 일반화시키고 있습니다. 인과응보는 하나의 논리일 뿐이지 모든 사람, 모든 일에 적용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인과응보 논리대로라면 우리 인간은 하느님 앞에서 살아남을 사람이 사실 아무도 없습니다. 또한 고통과 기쁨을 선과 악으로 갈라놓은 것 자체도 지나치게 인위적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하나일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습니다.
2. 참된 위로자
인과응보라는 논리로 욥을 추궁하는 엘리바스의 모습이 어찌 보면 참 철없어 보입니다. 초인적인 힘으로 버티고 욥에게 친구로서 할 이야기는 아닙니다. 본문 2절에 언급되었듯이, '참을 수 없어 말을 한다'고 했습니다. 기왕에 그리된 것 더 참았어야 했습니다. 하나마나 한 말이요 그 말로 인해 욥은 더 깊은 고통의 수렁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엘리바스의 처방은 그런 것입니다. ‘네가 잘못한 게 뭔지 생각해 보라’는 것이요, ‘다시는 그런 잘못 저질러 이런 고통을 받지 말라’는 뜻입니다. 논리정연하고 명쾌한 충고입니다만, 고난당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친구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입장에서 하고 싶은 말을 했을 뿐, 욥에게는 고통이 가중되었을 뿐입니다. 문득 ‘진정한 위로자’의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 나의 고통과 기쁨을 함께 하는 그런 사람 말입니다. 그런 위로자를 과연 세상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그러고 보면 세상에 참된 위로자는 사실상, 자신 밖에는 없습니다. 내가 나를 위로할 수 있는 이, 그런 이가 주님으로부터 위로 받고 사는 사람의 모습 아닐까요?
. 읽은 말씀: 욥기4:1-11
. 내 용: 친구 엘리바스의 충고
1. 욥의 탄식이 마무리되면서 욥의 친구 데만 사람 엘리바스의 충고가 시작됨.
2. 엘리바스는 고난당한 사람들을 돕던 욥이 막상 자신의 고난 앞에서 좌절하는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움을 표시함.
3. 욥이 당하는 고통은 욥이 뿌린 씨앗이라는 사실을 지적함.
. 묵상 말씀: “잘 생각해 보아라. 죄 없는 사람이 망한 일이 있더냐? 정직한 사람이 멸망한 일이 있더냐?”(욥4:7).
1. 인과응보론
‘인과응보론因果應報論’은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그에 따르는 결과가 있다는 뜻입니다. 선한 원인에는 반드시 선한 결과가 따르며, 악한 원인에는 악한 결과가 따른다는 원리이기도 하죠. 오늘 본문에서 욥의 친구 엘리바스는 그러한 논리로 욥을 추궁(?)하고 있습니다. 욥이 아무 잘못 없이 고통을 당할 리 만무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뭘 어쩌라는 말일까요? 정말, 우리가 당하는 고통이 꼭 우리가 뿌린 씨앗 때문일까요? 오늘 욥의 친구가 내린 욥의 고난에 대한 분석과 처방은 좀 문제가 있습니다. 우선, 세상적인 논리를 너무 일반화시키고 있습니다. 인과응보는 하나의 논리일 뿐이지 모든 사람, 모든 일에 적용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인과응보 논리대로라면 우리 인간은 하느님 앞에서 살아남을 사람이 사실 아무도 없습니다. 또한 고통과 기쁨을 선과 악으로 갈라놓은 것 자체도 지나치게 인위적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하나일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습니다.
2. 참된 위로자
인과응보라는 논리로 욥을 추궁하는 엘리바스의 모습이 어찌 보면 참 철없어 보입니다. 초인적인 힘으로 버티고 욥에게 친구로서 할 이야기는 아닙니다. 본문 2절에 언급되었듯이, '참을 수 없어 말을 한다'고 했습니다. 기왕에 그리된 것 더 참았어야 했습니다. 하나마나 한 말이요 그 말로 인해 욥은 더 깊은 고통의 수렁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엘리바스의 처방은 그런 것입니다. ‘네가 잘못한 게 뭔지 생각해 보라’는 것이요, ‘다시는 그런 잘못 저질러 이런 고통을 받지 말라’는 뜻입니다. 논리정연하고 명쾌한 충고입니다만, 고난당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친구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입장에서 하고 싶은 말을 했을 뿐, 욥에게는 고통이 가중되었을 뿐입니다. 문득 ‘진정한 위로자’의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 나의 고통과 기쁨을 함께 하는 그런 사람 말입니다. 그런 위로자를 과연 세상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그러고 보면 세상에 참된 위로자는 사실상, 자신 밖에는 없습니다. 내가 나를 위로할 수 있는 이, 그런 이가 주님으로부터 위로 받고 사는 사람의 모습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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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서 그것을 기대하는건 무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